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컬럼비아 레코드 (문단 편집) ===# 1950년대 #=== 1951년, 미국 컬럼비아는 빅터가 2년 전에 선보였던 45rpm 포맷의 레코드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테드 월러스타인이 컬럼비아 레코드 회장직에서 은퇴했고, 컬럼비아 또한 수십 년간 지속된 EMI와의 유통 계약을 끊고 필립스 레코드와 유통 계약을 체결하여 북미 이외의 지역에 컬럼비아 레코드를 판매하게 되었다. EMI는 1968년까지 오케(Okeh)와 이후 에픽(Epic) 레이블 음반을 지속적으로 유통하였다. EMI는 또한 호주와 뉴질랜드에 컬럼비아 레코드를 지속적으로 유통하였다. 아메리칸 컬럼비아는 EMI가 오랜 연주 음반을 도입하는 것을 꺼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컬럼비아는 1950년 프로듀서이자 밴드 리더인 미치 밀러를 머큐리 레이블에서 멀어지게 한 후 1950년대에 가장 성공적인 비 록 음반 회사가 되었다. 많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컬럼비아는 1960년대 중반까지 10대 로큰롤 시장에 주로 관여하지 않았는데, 이는 주로 밀러가 로큰롤을 혐오하는 표현을 자주 했던 것 때문이었다. (밀러는 1930년대 이스트만 음악 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컬럼비아의 경영 간부 고다드 리버슨과 친구였던 고전적으로 훈련된 오보이스트였다.) 밀러는 빠르게 머큐리의 가장 큰 아티스트인 프랭키 레인을 영입했고, 토니 베넷, 마할리아 잭슨, 지미 보이드, 가이 미첼(밀러의 이름에서 따온 예성), 조니 레이, 포 래드, 로즈메리 클루니, 케이 랜드, 레이 코니프, 제리 베일 및 조니 매티스를 포함한 10년 내 가장 큰 음반 스타들 중 몇 명을 발굴했다. 그는 또한 10년 내 레이블의 최고 여성 음반 스타 도리스 데이(Doris Day)의 초기 싱글들을 감독했다. 1953년에 컬럼비아는 새로운 자회사 레이블인 에픽 레코드(Epic Records)를 설립하였다. 1954년 컬럼비아는 스파톤 레코드(Sparton Records)와의 유통 계약을 종료하고 캐나다의 컬럼비아 레코드(Columbia Records)를 설립하였다. 이미 마티 로빈스(Marty Robbins), 레이 프라이스(Ray Price), 칼 스미스(Carl Smith)를 포함한 컨트리 음악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컬럼비아는 1955년 선 레코드(Sun Records)로부터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계약에 15,000 달러를 입찰하였다. 프레슬리의 매니저인 톰 파커 대령(Colonel Tom Parker)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프레슬리를 RCA 빅터(RCA Victor)와 계약하였다. 그러나 컬럼비아는 1958년 두 명의 선 아티스트 조니 캐시(Johnny Cash)와 칼 퍼킨스(Carl Perkins)와 계약하였다. 1954년, 미국 컬럼비아는 컬럼비아의 예술 감독 S. Neil Fujita가 디자인한 새로운 모더니즘 스타일의 "Walking Eye" 로고를 선보였을 때, 결정적으로 과거와 결별했다. 이 로고는 사실 음반(눈)에 스타일러스(다리)를 묘사하지만, "눈"은 또한 미묘하게 CBS의 텔레비전 주요 사업과 그 부서의 상징적인 눈 로고를 나타낸다. 콜롬비아는 음반사에 "notes and mike" 로고를 계속 사용했고 1958년에 "notes and mike"가 단계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심지어 두 로고를 모두 보여주는 홍보 라벨을 사용했다. 캐나다에서, 콜롬비아 78s는 1958년에 "Walking Eye" 로고로 압박을 받았다. 원래의 Walking Eye는 키가 크고 견고했다; Walking Eye가 1990년대 대부분 동안 산발적으로만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1961년에 여전히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는 익숙한 것으로 수정되었다. 비록 빅 밴드 시대는 지났지만, 컬럼비아는 듀크 엘링턴과 몇 년 동안 계약을 맺고 1956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엘링턴의 밴드가 자정 이후 광란을 일으켰던 역사적인 순간을 포착했는데, 이는 경력이 교착 상태에 빠진 밴드 리더에게 활력소가 되었음을 증명했다. 새로운 수석 프로듀서 조지 아바키안(George Avakian)의 지휘 아래 컬럼비아는 일반 대중의 재즈 감상과 이해에 가장 중요한 레이블이 되었고(아바키안의 다작하고 지각력 있는 플레이 바이 플레이 라이너 노트의 도움으로) 루이 암스트롱의 LP 시리즈를 발매했으며, 1959년에 남아있는 두 현대 재즈 아티스트 데이브 브루벡과 마일스 데이비스(Dave Brubebeck and Miles Davis)와 장기 계약을 체결했다. 이 음반은 브루벡 콰르텟의 Time Out by the Brubebeck Quartet과 Kind of Blue by the Davis Sextet으로, 2003년 롤링 스톤의 "역대 가장 위대한 음반 500장" 목록에 12위로 등장했다. 또 다른 프로듀서 테오 마케로(Teo Macero)와 함께 컬럼비아는 재즈 작곡가/음악가인 Thelonious Monk 및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와 계약을 맺었고, 마케로는 데이비스의 1958년 6집 앨범 Milstones부터 록과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재즈 결합의 혁신자이자 아바타인 Miles Davis 경력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1954년, 콜럼비아는 데이브 브루벡 콰르텟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소그룹 현대 재즈를 받아들였고, 이것은 현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재즈 앨범(현재까지)인 재즈 고즈 투 컬리지(Jazz Goes to College)의 발매로 이어졌다. 동시에, 브루벡 콰르텟의 레이블 데뷔이기도 한 소그룹에 의한 컬럼비아의 첫 번째 현대 재즈 발매와 함께, 대학 캠퍼스에서의 브루벡의 성공 현상에 대한 타임지 커버스토리였다. 겸손한 데이브 브루벡은 재즈 음악가에 대한 두 번째 타임 커버스토리(루이 암스트롱의 사진이 첫 번째 주인공)는 자신이 아니라 듀크 엘링턴이 만들었다고 말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2년 안에 엘링턴의 사진은 1956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의 그의 성공에 이어 타임지 커버에 실릴 것이었다. 컬럼비아에서 녹음된 뉴포트의 엘링턴은 또한 밴드 리더이자 작곡가, 피아니스트의 베스트셀러 앨범이었다. 게다가, 타임지 커버에 실렸던 재즈 거물들의 독점적인 삼위일체는 모두 컬럼비아 예술가들이었다. (1960년대 초, 컬럼비아 재즈 아티스트 Thelonious Monk는 같은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콜롬비아는 1956년 ARC가 캐피톨 레코드를 사들이면서 잃어버린 캐피톨 레코드 제품을 대체하기 위해 호주 레코드사가 미국 컬럼비아 제품 유통을 인수하면서 호주와 뉴질랜드의 유통업체를 바꿨다. 당시 EMI가 컬럼비아 상표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컬럼비아 자료는 CBS 코로넷 레이블에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발행됐다. 같은 해, 전 컬럼비아 A&R 매니저였던 고다드 리버슨은 회사의 다양한 국제 부문과 라이선스뿐만 아니라 컬럼비아와 에픽을 포함한 전체 CBS 음반 부문의 사장으로 승진했다. 그의 지도력 아래, 회사의 음악 부문은 곧 RCA 빅터를 제치고 세계 최고의 음반 회사가 되었고, 스타가 많이 출연하는 아티스트 명단과 대중적인 재즈, 클래식, 무대와 스크린 사운드트랙 타이틀에 대한 비교할 수 없는 목록을 자랑했다. 1938년에 A&R 매니저로 콜롬비아에 합류한 리버슨은 그의 개인적 우아함과 품질에 대한 헌신으로 유명했으며, 많은 크게 성공한 앨범과 싱글의 발매를 감독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잘 팔리지 않은 프레스티지 발매와 심지어 아놀드 쇤베르그와 안톤 폰 베번의 작품의 완전판과 같이 제한적인 매력을 가졌던 일부 타이틀들까지 감독했다. 그의 첫 번째 주요한 성공들 중 하나는 1957년에 전 세계적으로 500만 장 이상이 판매된 마이 페어 레이디의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팅 앨범으로, 그 당시까지 발매된 가장 성공적인 LP가 되었다. 리버슨은 또한 오랫동안 재임한 CBS의 윌리엄 S. 팰리 사장에게 50만 달러를 투자한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제작의 유일한 후원자가 되도록 설득했고, 이는 이후 회사에 약 3,200만 달러의 수익을 안겨주었다. 1958년 10월, 컬럼비아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조니 매티스, 도리스 데이, 가이 미첼, 조니 레이, 조 스태포드, 토니 베넷, 로즈마리 클루니, 프랭키 레인, 포 래드 등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Greatest Hits' 시리즈 패키지를 내놓았다. 몇 달 후, 매티스의 모음집만이 차트에 올랐는데, 이는 당시 빌보드 앨범 차트에 25개의 자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음집들이 너무 성공적이어서 컬럼비아는 대개 아티스트의 경력이 쇠퇴할 때 광범위한 기준으로 이러한 패키지를 수행하게 되었다. {{{+2 '''스테레오'''}}} 비록 컬럼비아가 1956년에 스테레오로 녹음을 시작했지만, 스테레오 LP는 1958년까지 제조되기 시작하지 않았다. 컬럼비아의 최초 스테레오 발매 중 하나는 뉴욕 필하모닉과 웨스트민스터 합창단이 지휘한 헨델의 메시아(1956년 12월 31일, 앰펙스 300-3 기계를 사용하여 1 ⁄2인치 테이프로 녹음)의 축약되고 재구성된 공연이었다. 번스타인은 예수탄생과 부활 부분을 결합했고, 공연을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끝냈다. RCA 빅터와 마찬가지로, 브루노 월터,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컬럼비아를 위해 축약된 메시아를 녹음하기도 했던 유진 오먼디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포함하여 초기 스테레오 녹음의 대부분은 클래식 아티스트들에 대한 것이었다. 1949년 컬럼비아의 뉴욕시 스튜디오에서 토마스 비첨 경과 함께 처음 녹음을 했던 뉴욕의 선두 음악가들의 앙상블인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일부 세션이 이루어졌다. 조지 셀과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주로 에픽을 위해 녹음했다. 에픽이 클래식 음악을 중단했을 때, 명단과 카탈로그는 컬럼비아 마스터웍스 레코드로 옮겨졌다. 컬럼비아는 1958년 여름에 첫 번째 팝 스테레오 앨범을 발표했다. 처음 12개 정도의 앨범들은 모두 이미 모노로 발매된 스테레오 버전이었다. 1958년 9월이 되어서야 컬럼비아는 동시에 모노/스테레오 발매를 시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스테레오 녹음의 모노 버전은 1968년에 중단되었다. LP의 도입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컬럼비아는 1958년에 전 세계의 음악을 선보이는 "Adventures in Sound" 시리즈를 시작했다. 카탈로그 번호 체계만 따지면, 처음 몇 년 동안은 모노 버전과 스테레오 버전 간에 상관관계가 없었다. 콜럼비아는 팝 스테레오 발매를 위해 새로운 CS 8000 시리즈를 시작했고, 스테레오 발매를 일종의 전문 틈새 레코드로 간주하면서, 2년 동안 모노와 스테레오 번호를 연결할 수고를 하지 않았다. 마스터웍스의 클래식 LP들은 MS 6000 시리즈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마스터웍스의 쇼튠즈 앨범들은 OS 2000이었다. 마침내, 1960년에, CL-1510으로 발행된 램버트, 헨드릭스 & 로스 싱 엘링턴, 램버트, 헨드릭스 & 로스 앨범에 필적하기 위해 팝 스테레오 시리즈는 8300개에서 8310개로 뛰어올랐다. 그때부터, 팝 음반의 스테레오 번호는 정확히 모노보다 6800개가 더 높았고, 스테레오 클래식 음반들은 모노 번호에 600을 더했고, 쇼튠즈 앨범들은 모노 번호에 3600을 더했다. 각각의 카탈로그 시리즈에서 오직 마지막 두 자리 숫자만 일치했다. 팝 스테레오 LP들은 CBS 레코드가 모든 레이블에 걸쳐 카탈로그 넘버링 시스템을 개편하고 통일했던 1970년까지 높은 9000년대에 진입했다. 마스터웍스 클래식 앨범들은 7000년대에 있었고, 쇼튠즈는 낮은 2000년대에 머물렀다. 컬럼비아의 공학부는 모노 소스로부터 스테레오를 에뮬레이트하는 프로세스를 개발했다. 그들은 이 프로세스를 "Electronically Rechanneled for Stereo"라고 불렀다. 1962년 6월 16일자 빌보드 매거진(5면)호에서 컬럼비아는 도리스 데이, 프랭키 레인, 퍼시 페이스, 미치 밀러, 마티 로빈스, 데이브 브루벡, 마일스 데이비스 및 조니 매티스의 앨범을 포함하여 모노로 녹음된 대히트 컴필레이션의 "리채널화" 버전을 발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